경향신문에 실린 김민아 논설위원의 글입니다. 함께 읽어보아요. ^^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대표로 선출됐다.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제1야당 지도자를 모두 여성이 맡게 됐다. 한국 정치사 초유의 사건이다. 호사가들은 여의도에 ‘여성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나 역시 한국 정치에 ‘여풍’이 불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바람을 감지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내가 주목하는 ‘그녀들’은 박영선 민주통합당 최고위원과 이정희·심상정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다.

박영선은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의 ‘숨은 승자’다. 후보 등록 마감 몇 시간 전에야 출마를 결정하고, 별다른 조직의 뒷받침이 없었는데도 당당히 3위에 올랐다. 2위(문성근)와의 차이는 0.94%에 불과하다. 모바일 투표 중 39세 이하 젊은층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 이정희와 심상정은 정치력을 발휘해 진보통합을 주도한 데 이어, 민주통합당에 새 지도부가 들어서자 4월 총선의 선거연합을 제안하며 야권연대 논의에 불을 붙였다.
살아온 길도 다르고 이념적 지향도 다른 박영선·이정희·심상정은 세 지점에서 한데 묶인다. 첫째, 세 사람은 명중률 높은 ‘저격수’다. 재벌·검찰·수구언론에 굴하지 않고 맞서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박영선은 17대 국회 때 금산분리법을 통과시켰고, 18대에선 일반지주회사의 금융회사 지분 보유를 허용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를 저지했다. 천성관 검찰총장·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에서 낙마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당대회 이후 처음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선 재벌개혁과 검찰개혁을 당의 최대 과제로 짚었다. 이정희는 국군기무사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례를 폭로하고, TV 토론회에서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해 조선일보 고위임원을 당당히 거론했다. 조선일보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했지만 1심에서 이겼다. 촛불집회, 용산참사,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쌍용차 사태, 기륭전자 장기파업 등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심상정은 또 어떤가. 17대 국회 때 박영선·노회찬 등과 함께 삼성그룹의 순환지배구조와 경영권 세습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삼성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둘째, 세 사람은 국회의원 노릇을 제대로 했다. 정치인의 본령인 민생에 강하다는 얘기다. 박영선은 지난해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맡아 반값 등록금 등 보편적 복지정책 수립을 주도했다. 이정희는 4대강 사업 논란이 한창일 때 강의 저류량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4대강 사업 찬성론을 반박했다. 국회 보좌진을 대상으로 ‘2009년 가장 돋보인 의정활동을 한 의원’을 묻는 조사에서 1위에 올랐다. 심상정은 2004년 국정감사에서 이헌재 경제부총리를 상대로 “파생상품 시장을 통한 정부의 외환 개입으로 1조8000억원대 손실을 입었다”고 지적해 잘못을 시인하게 만들었다. 그해 ‘여야 의원이 뽑은 최고 국회의원’에 선정됐다.

셋째, 세 사람은 공감능력을 가졌다. 뉴스앵커 출신 박영선은 언뜻 차갑고 냉정해 보인다. 하지만 민주당이 참패한 18대 총선 당시 노동자와 영세상인이 많은 서울 구로을에서 당선되면서 공감능력을 입증했다. 이정희에 대해선 유시민의 인상기로 대신한다. “살벌한 업계인 이곳(정치권)에서 저렇게 착한 얼굴로 살아간다는 것은 선천적 우월성이다.” 대입학력고사에서 여자 인문계 수석을 한 엘리트이지만 유연하고 합리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심상정은 지난해 6·2 지방선거 전 시민들의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 경기지사 후보를 사퇴했다. 당 차원의 징계조치까지 감수한 통큰 결단이었다.

이들 세 사람이라면 남성들이 흔히 여성 정치인의 강점으로 언급하는 부드러움과 섬세함의 차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민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며, 불의한 권력에 정면으로 맞서 그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 정치 말이다.

칼럼니스트 고종석은 2006년 한명숙이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을 때 “한 총리는 그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민주적이다. 최고위직 권력의 순환을 성적 소수자로까지 넓혔기 때문”이라는 칼럼을 썼다. 그러면서도 “10년쯤 뒤에는 한 총리보다 더 민주적인 심상정 총리나 심상정 대통령을 봤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지난해에는 “요즘 박영선 대통령이나 추미애 대통령 (탄생) 같은 상상을 한다”고도 했다.

‘생물학적 여성’이 권력을 잡는 일도 의미가 있지만, 이제는 그 이상을 기대할 때다. 누구의 딸이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전 인생을 걸고 정치하는 여성들, 희소성 대신 실력과 논리와 집념으로 무장한 여성들이 권력을 잡기 바란다. 여성 혹은 여성적 가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명예 남성’ 마거릿 대처도 나름의 역할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는 1979년의 영국이 아니다. 2012년의 한국은 ‘진짜 여성 정치인’을 원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1162105595&code=9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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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7 16:56 2012/01/1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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