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경력개발센터가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리더 13명의 성공 뒤안길의 땀과 눈물을 소개한 책을 작년 여름에 펴냈습니다. 제목은  ‘꿈꾸는 여대생에게 들려주는 여성 리더들의 이야기 ’입니다. 이글은 이 책에 실린 심상정 대표의 글로 이번에 홈페이지를 개편하면서 다음 블로거에 있던 글을 퍼왔습니다.(관리자)

심 상 정 진보신당 공동대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이자 여성 정치인인 심상정 전 국회의원. 현재 진보신당 공동 대표인 그녀가 후배들을 위한 인터뷰를 갖기 위해 모교를 찾았다. 바쁜 와중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어 모교를 방문한 심 대표에게서 후배들을 위한 정감어린 애정과, 필요한 곳은 어디든 달려가는 무한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낌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모습에서 신념을 가지고 그에 맞는 꾸준한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의 모습, 삶의 이유를 찾은 사람의 당당한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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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이라는 외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는 대학 시절부터 대단한 운동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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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본인은 전혀 운동권에 들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시대가 워낙 무서울 때라 어머니께서 늘 “운동 하지 말라,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대학은 지성과 낭만의 전당으로서 도시락 먹으려고 자리 깔고 앉으면 시야가 확 트인 멋진 풍경이 펼쳐지고 도토리가 머리 위로 또르르 떨어지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그 당시는 대학만 나오면 취업이 쉽게 보장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학에 들어가면 연애도 실컷 하고 책도 마음껏 읽고 여행도 많이 다니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녀는 신입생 때 7cm 이상의 높은 구두와 화사한 스커트, 그리고 검은 생머리를 휘날리면서 한껏 멋을 부리고 다녔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녀가 괜찮다고 점찍은 남학생들은 하나같이 운동권이었고, 좋아하는 남학생을 쫓아서 시위대를 따라다니던 어느 날 시위 현장에서 그만 사진이 찍혔다.
 
“치마 입고 하이힐 신은 채로 신림 사거리까지 시위를 나간 적이 있는데 다음 날 학생처장이 저를 부르더군요. 당시 학교에서는 시위 대열을 촬영해서 ‘사진 체증’을 한 다음 관련 학생을 따로 ‘지도’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사진만 갖고 보면 제적감인데 시위 현장에서의 저의 패션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까 학생처장이 안경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의아한 눈으로 계속 쳐다보더니 첫 마디가 ‘자네 운동권 애인 뒀나?’였어요.” 그녀는 그 일로 근신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녀는 급속도로 운동권에 빠져 들었다. 패션 또한 운동권 패션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학창시절 그녀가 가졌던 장래희망은 소외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자였다.


“지금 학생들한테 장래 희망을 물으면 ‘좋은 대학 가고 싶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 이렇게 답하더군요. 그러나 우리 때는 예술가, 외교관, 교육자가 되겠다는 등의 꿈이 있었어요. 지금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의 축적을 삶의 목표로 삼는 경향이 있지만 과거에는 우리 사회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사람을 인정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그녀 자신도 교육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고, 가장 많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자가 되겠다는 그런 꿈을 가졌다. 그래서 서울대 역사교육과에 진학 했다. “요즘 시대에 제가 대학을 다녔다면 노동자 현장에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그 어려운 시대가 제 꿈을 노동자와 묶어 준 것 같아요.”



암담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본 후 그녀의 양심은 결코 그녀에게 안락한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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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초에는 대학 전체가 운동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모두가 개인의 삶보다는 역사와 사회에 몰입할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도 수많은 대학생들처럼 야학도 하고, 공활(방학 때 공장에 들어가서 하는 활동), 농활도 하는 평범한 학생의 하나였을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25년간 외길을 걸어올 수 있었는가? 얼마나 투철한 이념이 있었으면 그럴 수 있었는가?” 와 같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저는 남자 친구를 따라서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노동운동은 구로공단에 공활 갔다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노동현장을 보고 우리나라의 노동현실의 실상을 깨닫게 된 것이죠. 우리 사회의 다수가 노동자인데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그 무렵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고 더불어 사는 것이 우리 사회가 참다운 민주 사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그렇게 노동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함께 출발했던 많은 사람들 중 사회주의 이념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90년대 초반에 거의 흩어지다시피 했다.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사회주의 이념에 깊은 회의를 갖게 된 것이 이유였다. “제가 유달리 특별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대다수가 운동권이었고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했는데, 다만 지속성의 측면에서 이념에 의존했던 사람들이 나가 떨어진 거죠.

그러나 그녀는 이념적인 구속력 때문에 운동을 했다기보다는 지식인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라고 고민했던 것이고, 교육자가 되고 싶어서 사범대에 갔지만 교육자가 되는 것보다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교육과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지식인으로서 더 적극적으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계속 노동현장에 남았으며, 그래서 걸어가던 길을 계속 걷고 또 걸었다.




민주노총을 만들고 대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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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가 민노총을 만들었죠. 민주노총에서 금속노조 일을 맡았습니다. 20만 조직을 실무적으로 통제하고 조정하는 일을 했어요.” 심 대표는 의정활동 때 재경부 관료들로부터 “언제 경제 공부했느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해박한 경제 지식을 갖고 있다. “제대로 경제 공부를 한 적도 없지만 노동 운동한 경험이 경제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된 거죠.”

또한 그녀는 “바깥에서 볼 때는 다 투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노조 활동 시에는 우리나라 실물 경제를 검토해야 하고 협상 기술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관료들이 사석에서 저한테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오히려 교수보다 노동자들과 협상이 더 어렵다고 해요. 교수들이 자기 전공분야 얘기하면 그 말을 고개 숙이고 그냥 들어주면 되는데, 노동자들은 그렇게 안 되는 거죠.” 노동자들의 싸움은 학술적이거나 이론적인 논리싸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문제를 바탕으로 한 몸부림이기에 결코 추상적일 수 없고 그래서 더 비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그녀가 가장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질문들은 ‘그래서 그 정책이 누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현재는 대표의 자리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그녀지만, 정작 노동 운동을 하면서는 대표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표’를 못 하기도 했고 안 하기도 했었다고 말한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금속노조 위원장에 출마하라는 강력한 권고도 있었다. 금속노조 구성원의 96%가 남성인 남성 중심적인 공간이었지만 그녀는 그 곳에서도 남자 못지않은 인정을 받아왔다.
 
민노당에서 비례대표를 뽑을 때 역시 당원 직선으로 순번을 매기는데 민주노총위원장이나 산별연맹위원장을 한 번도 못한 그녀가 최다득표를 받았다. 수십 년 동안 노동운동이라는 외길을 걸어왔고 실무적인 일을 해 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았다는 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이유다. 그런 그녀가 평생 노동운동의 연장선으로 국회로 뛰어든 이유는 주변의 권유와 필요한 위치가 그곳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계파를 초월해서 민노당 비례대표 1번은 여성이면서 노동자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본인은 물론, 주변에서도 그녀가 그런 위치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25년 동안 같은 일을 했다는 헌신, 진정성, 또 나름대로 그 안에서 능력도 인정받았던 측면이 있었던 것”이라고 그녀는 그 이유를 평가했다.



여성의 권익을 위해 주력했던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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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회 때 여성들을 위해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쉴 틈이 없었다. 가정에서는 차별 받지 않고 자란 어린후배들이 사회로 진출할 때는 여전히 딱딱한 가부장적인 차별을 느끼게 되는 것에 대해 마음이 아팠다. 가능하면 그런 일을 줄이기 위한 몫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사회 곳곳에 아직도 가부장제 문화가 심해 사회적으로 남녀차별 문화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그녀는 의정활동 내내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공분야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중앙인사위원장에게 공무원들의 남녀 구성비 자료를 요청했다. 결과는 우울했다. 우리나라 중앙부처가 전부 48개인데 그 중에서 여성 과장급 인사가 고작 4명 이었다. 9급 공무원은 48%로 절반 가까이 되지만 5급은 5%, 4급은 4%, 3급은 3%, 2급은 2%, 1급은 1.2% 정도였다고 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앞으로 1년 안에 중앙부처 하나당 여성 과장 한 사람씩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년 동안 48개 중에 13개 부처가 여성 과장을 못 만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4급으로 승진될 5, 6급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이 없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후 2년 동안 오랜 공을 들여서 하위직부터 4급 까지 여성의 비율을 늘였고, 결국 처음 원했던 목표까지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주요한 현안에 대해서는 획기적인 조치와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우리나라가 법과 제도에 있어서 다른 나라에 뒤떨어지지 않는데, ‘소수자 우대 정책 affimative action’이 약해요. 실제 선거 제도상에는 여성 할당제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여성 차별을 줄이는 조치가 매우 적어요.

아이를 키우는 문제에서도 남편도 육아휴직을 받도록 돼 있지만, 쓰는 사람이 2%도 안 되잖아요.” 그 이유는 물론 남편한테 “내가 일할 테니 당신이 애 키워라”고 하는 여성도 없고, 남편 스스로도 휴직해서 애를 키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럴 것이라고 이해한다지만 네덜란드에 가보니 남편이 육아 휴직을 하고 여성이 직장을 다니는 경우가 보편화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니, 이 나라 남자들이 왜 이렇게 쿨한가?’라며 감탄했죠. 재미있는 것은 막상 육아 휴직한 남자들을 인터뷰해 보니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것을 여성들이 독점했다’고 하더군요.” 네덜란드에는 남자가 육아 휴직을 하면 승진에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남성들이 실제로 육아 휴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제대로 갖춰진 것이 우리나라와의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제도와 현실 사이에 많은 괴리가 있고,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바꾸고 싶어 한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조직생활하기 어려운 점에 대해 그녀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녀가 보기에 우리나라 여성들이 조직 생활하기 어려운 데에는 크게 다섯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여성들한테 이중 잣대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여자가 화장을 하면 ‘쥐 잡아 먹었냐’고 하고 화장을 안 하면 게으르다고 한다지요. 프랑스 사회당 대표 세골렌 루아얄 대선 후보도 부드러운 여성 리더십으로 굉장히 각광받았는데, 낙선하고 나니 카리스마가 부족했다는 말이 나오는 걸 프랑스 칼럼에서 봤어요. 여성 리더들이 나오면 처음에는 모성적 리더십을 높이 부각시키다가 나중에는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뭐라고 하고, 이런 식인 거죠.

작년에 제가 대선 경선 나갈 때도 남성 같다면서 부드러운 모성을 갖추라고 주문했었거든요.” 이처럼 여성 리더에 대한 일반적인 상이 국민들에게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보니까 여성 리더에게는 전통적인 여성상과 남성적 리더십을 동시에 갖추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 사회에서 일반 여성들도 이 같은 대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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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남성들이 여성 상사 밑에 있는 것을 거북해 한다는 것이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상급자가 질책하고 화를 내도 툴툴 털고 마는데, 여성 상사 같은 경우 아무리 좋은 말로 이야기해도, 술자리에 가서 여성 상사는 역시 피곤하다고 하면서 뒷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여성 밑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는 만큼 여성의 조직 생활에 대한 적응 역시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인적 네트워크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조직 생활은 실력만 갖고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정보 채널인 인맥을 많이 갖춰야 돼요. 특히 남자들은 학연, 지연 등의 여러 네트워크를 갖고 사람들을 사귀고 정보를 얻잖아요. 저도 남편하고 얘기하다가 어떤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남편은 단번에 그 친구가 어느 고등학교 몇 회에 대학교는 어디고, 이런 것부터 따져요. 또 진보 신당 공동 대표인 노회찬 씨와 같이 행사장에 가면, 저는 사회적으로 활동할 때의 인맥밖에 없는데, 노 대표는 “아, 몇 회 선배시구나”로 시작해서 “어! 부산에 누구...” 이런 식으로 인사하기 바쁜 거죠.” 기본적으로 남성들의 인적 인프라가 강점을 많이 가질 수 있으니 여성들이 정보력을 키우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남성 중심적인 조직문화에서는 남성들끼리 사적인 자리를 많이 갖게 되고 그런 사적인 자리에서 많은 것이 협의하고 해결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 국회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남자 의원들끼리는 저녁에 술자리에서 격의 없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중요한 정보가 교환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자연스럽게 빠지다 보면 그런 정보력에서 취약해지기 쉽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여성들이 숫자에서도 열세라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이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가 택한 방법은 남성중심 문화에 대한 정면 돌파였다.


이에 대해 심 대표는 현실을 인정하고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여성으로서의 비주류의 삶이 그녀에게 어려움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소외감 같은 것이 오늘날의 그녀를 있게 한 큰 힘이 됐다고 그녀는 믿고 있다.

아들만 위하는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보니, 최초의 차별을 경험한 곳도 가족 내에서였고 서울대학교 내에서도 여성이 많지 않다 보니 학생운동에서도 여성 배제가 심했다. 처음에는 여학생들을 받아주었던 학회 안에서도, 3학년 정도가 된 여학생들은 할 일이 없어졌다. 학회 중심에는 대부분의 구성원인 남학생들만 후배를 지도하고, 중심적 역할을 하곤 했다. “그런데 당시 이대생이나 숙대생들을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으면 또 중요한 일을 잘 해내더군요. 그래서 저는 여성들한테 어떤 역할을 맡게 되면, 절대 양보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 자리의 역할을 검토해보고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요 .” 그래서 대학생인 그녀가 선택했던 것은 기존 학회와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었다. “남성 중심적인 학생 사회에 정면 돌파해 본 거죠. 80년대 초에 ‘대학의 봄’이라고 해서 대학 민주화가 다시 부활하고, 학생회 체제가 복원되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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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여학생회는 원래 학생회 내의 산하조직이었는데, 저는 별도의 총여학생회를 창설했어요. 이것이 서울대에서 최초의 총여학생회였는데, 남학생들 사이에서 반발이 아주 거세게 일어났죠.” 뿐만 아니라 그녀는 처음으로 여학생 학회도 구성해서 처음으로 여학생들끼리 커리큘럼도 짜보고, 후배도 지도했었다. 또 노동운동의 앞길을 개척하겠다는 결심으로 구로 공단으로 찾아가서 먼저 취직하기도 했다. “만일 기존 학회에 편입되어 있었다면 그냥 세미나 하고 고학년이 되면 옆으로 물러나 있었겠죠. 그 때 제가 여성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새로 만들어 본 것처럼, 지금 젊은 여성들도 새로운 공간과 영역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어가서 도전해 보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노동운동의 동반자에서 평생 반려자까지


심 대표의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남편을 자신과 함께 노동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일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는 좋은 동반자라고 설명한다. “남편이 같은 학교 75학번에 동양사를 전공했지만, 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어요. 그 때는 점조직 비슷하게 돼 있어서 언더그라운드로 활동하니까 서로 잘 몰랐는데, 김문수 경기도 지사가 중매를 서서 이야기 들은 지 7년 만에 결혼했어요. 그 때가 서른네 살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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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안 하고 있자 주변사람들은 그녀보고 독신주의자냐고 물었다. “저는 독신주의를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다만 노동운동가로서의 삶과 결혼 생활을 접목시킬 용기가 없었던 건데, 다행히 같이 운동 하는 사람을 만났고, 제 일이나 가치관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또 결혼하고 나서 두 사람 중 누군가는 생계유지를 위해서 운동을 그만두고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활동가로서 더 적합하다면서 자신이 운동을 그만두면서까지 그녀를 지원해 주었다. 지금의 그녀가 있기까지는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남편과 그의 헌신적인 외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설움에도 굴하지 않는 꿋꿋한 외길 걷기


그녀의 집은 중산층이었다. 아버지와 언니는 교사였고 큰 오빠는 중소기업을 운영했었다. 경영의 어려움으로 집안이 어려웠던 적도 있었다. “부모님이 서울에서 장사도 하시고 고생도 많이 하셨어요. IMF 때도 부도가 나서 힘들었는데, 이제는 다 잘 살아요. 저만 빼고 형제자매 셋은 골프 모임을 자주 해요. 저희 집은 전통적으로 진보정치를 안 좋아하는 집안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다들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떠나 그녀가 헛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녀 또한 자신을 돌아보며, 딸이 노동 운동하면서 아이를 엄마한테 맡기니 환영 못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만날 아기를 맡기고 나가는 제 뒤통수에 대고 어느 날 어머니가 꾹 참았던 속내를 터트리듯이 ‘그만 해라!’라고 한마디 하셨어요. 그땐 저도 마음이 무너져 내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국회의원이 된 다음부터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아들이나 손자 안부는 묻지도 않아. 양쪽 집안이 모두들 제 안부만 묻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가족을 특별히 설득했다기 보다는 그 설움을 감수하면서 지금까지 꿋꿋하게 걸어왔다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고 회상한다.



스스로를 비주류라 생각하기에 더욱 소신 있게 노력하는 그녀


심 대표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비주류로서의 설움을 곳곳에서 참아왔다. 동창들 뿐 아니라 형제 자매조차 잘 만나지 않았다. “거의 25년간 노동운동만을 하면서 거기에 몰입해서 살았는데 이것이 남자들과 다른 점인 것 같아요. 남자들은 같이 노동운동 하면서도 동창회도 다 나가는데, 그러다 보면 자신의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되고 또 그러면 서럽고 그렇게 돼서 일찍 운동에서 멀어지게 돼요.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곳에 나가지도 않고, 또 고지식하고 순수하기도 해서 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사실 사회적 인프라가 정보를 얻는 데 도움도 많이 되지만, 심리적 동요의 요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의정 활동할 때도 보면 당장 국감하려고 왔는데, 1년 선배고 후배고 하면 아무래도 제대로 하기 힘들죠. 그러니 함부로 누구를 공격할 수도 없고 그런데, 여자들은 소신껏 행동할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요. 이게 다 일장일단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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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아니다. 그녀에게는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이 많기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않은 교수들도 그녀를 응원한다는 칼럼을 쓰고, 자발적인 지원자를 자청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녀의 자서전에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써준 사람들 얘기가 한결같이 “나는 심상정을 모른다”로 시작한단다. “그만큼 제가 사교 인프라가 약하다는 얘기인데, 워커홀릭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에만 몰두했던 측면이 있죠. 그렇지만 이렇게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고 그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녀의 꿈: 20대와 여성들에게 더 좋은 정치를 하는 것


“저는 정치를 하니까 좀 더 좋은 정치를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공간이 정치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보다 더 많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여성이 하는 정치가 남성이 하는 정치보다 더 좋다고 말한다. 여성 정치가 상대적으로 거품이 별로 없고 진솔하다는 것이 그녀가 말하는 솔직한 이유다. 또 생활 정치에 부합한다는 장점도 있다고 한다.

요즘 세계적으로 여성 정치인이 급부상하는 이유는 단순히 유행이 아니라 생활 정치가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그녀는 분석한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여성들의 영향력이 커진 것도 이러한 세계적 추세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여성의 일로 여겨져 왔던 교육, 복지, 환경 등이 최근 정치의 중요한 의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이제는 당리당략적인 정치에서 생활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죠. 우리나라 국민들이 정치인들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문조사하면 저는 교육이 제일 먼저 꼽힐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같은 살림 정치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여성이고, 그 리더십에 대한 요구가 여성들을 정치로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가 대두되고 있음에도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아직은 부족하다고 안타까워하는 심 대표는 직업의 측면에서도 정치는 ‘블루 오션’이라고 이야기한다.

지자체에서부터 중앙정치까지 할 일이 무궁무진하며 오히려 민간 분야보다 더 할 일도 자리도 많다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정치에 도전하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녀 역시자신이 하고자 하는 정치가 성공하는데 필요하다면 끊임없이 도전하고자 한다. 그녀가 정치로 가장 도움을 주고자 하는 20대와 여성에게 보다 가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보정치의 성공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그녀의 비전은 앞으로도 국회 안에서의 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데 가장 강력한 힘을 실어 줄 것이다.



진로 고민이 특히 많은 여성 후배들에게


“우리 때만 하더라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확인 과정이 있었어요. 최근에 발견한 건데 중학생인 우리 아들도 그렇고, 대학가로 강연 가서 보면 대학생들도 그런데, 무엇을 결정할 때 꼭 다른 사람들한테 의견을 물어 봐요. 그럼 저는 ‘네 인생인데 네가 결정해야지’라고 대답해 줘요. 제가 볼 때 젊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말에 잘 휘둘리는 것 같아요. 뭐 ‘IT 업계가 좋다더라’, ‘영어는 어느 정도 해야 한다더라’, ‘중국 시장이 좋다더라’ 등 미래의 전망을 현재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결정하는 거죠.” 하지만 이런 것은 단지 트렌드로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에 참고만 할 뿐 중요한 결정은 결국 자기 자신의 심도 있는 고민 끝에 본인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특히 젊은 여성 들은 무엇보다도 자기 삶의 이유를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이유를 묻고, 자기 근거가 분명하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어요. 한 쪽으로 물고기 떼가 지나가듯이 거기 따라가다 좌절하게 되면 자기중심이 없어지는데 반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매진할 때 그 분야에서 창조성이 발휘되고 만족도도 최고조에 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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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주어진 편안한 길을 마다하고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해 치열한 삶을 살아온 심상정 대표.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지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앞으로의 비전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당당함과 의연함으로 가득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후배들에게도 조언하듯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았기 때문일 것이고, 그 의미에 맞는 선택을 지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살고자 하는 방향을 찾는 것, 그리고 그 길을 흔들림없이 힘차게 나아가는 것. 그녀가 삶으로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그 모습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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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7 23:48 2010/01/27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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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생 2010/06/01 19: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헤헤..